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크라이나-헝가리 관계 (문단 편집) === 근세 === 자카르파탸는 비교적 척박하고 빈곤한 산악지대로 해당 지역의 농민 인구의 중추를 구성하던 [[루신인]]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농노]] 해방이 완료되기 전까지 헝가리인, 독일인 지주들에게 농노로 귀속되었다. 주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을 믿는 자카르파탸의 우크라이나인들은 [[가톨릭]]을 믿는 헝가리 왕국에서 2등 시민으로 차별을 받았으나, 빈곤 문제로 교육 수준이 낮아서 헝가리인, 독일인 지주들이 갑질을 하더라도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었다. 근세 자카르파탸의 농민 계층에는 루신인 외에도 [[루마니아인]], [[슬로바키아인]] 농노 인구도 적지는 않았다. 루신인들과 루마니아인들이 믿는 [[정교회]]나 [[동방 가톨릭 교회]]는 심각한 차별 대우를 받았는데 정교회 성직자들의 경우 '''농노로 취급'''받아서 농촌의 정교회 사제들조차 농노와 마찬가지로 지주를 위해 노역을 제공해야 했고, 체형에 처하기도 했다. 유럽 다른 지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17~18세기 헝가리가 지배하는 자카르파탸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갈리치아는 같은 정교회 전례를 유지하되 [[교황 수위권]]을 인정하는 동방 가톨릭 교회 문화를 공유하는 지역으로 묶이게 되었다. 빈곤한 상황과 차별에 시달리던 정교회 성직자들은 1649년 [[우주호로드|운그바르]]에서 동방 가톨릭 교회로의 개종을 공식적으로 결정했으며 1652년에는 로마 교황청에 이 결정을 전달하여 승인받고 인준받았다. 루신인 농민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정교회에서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회로 개종된 셈이었는데, 성직자들이 소요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교파가 변경된 것을 일반인들에게 비밀로 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직자들이 공식적으로 개종한 지 100여 년이 지난 1760년대까지도 루테니아 농민들은 실상을 모르고 자신들이 정교회에 소속된 것으로 여기고 살았다. 루테니아 농민들 중에 글을 배우거나 외부에 나가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 중에서 '알고보니 그동안 자신들은 정교회를 믿는 줄 알고 살았으나, 실제로는 동방 가톨릭 교회 성직자와 함께 동방 가톨릭 성당에서 미사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소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헝가리 왕국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카르파탸 지역의 루신인 농민들 사이에서 정교회-동방 가톨릭 관련 소요가 빈발하는 사태가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였다. 동방 가톨릭 성직자들과 오스트리아 정부조사반은 자카르파탸의 성직자 집단의 심각하게 어려운 경제적 여건과 여기서 비롯된 낮은 교육 수준을 원인으로 지적하였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한편으로 정교회를 탄압하고 동방 가톨릭 교회를 지원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카르파탸 지역 우크라이나인/루신인 성직자들이 교육 및 물질적 여건을 개선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는데, 이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발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갈리치아와 자카르파탸에서는 똑같은 종류의 종교 서적과 필사본이 사용되었다. 굳이 나누자면 갈리치아 일대의 동방 가톨릭 교회를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라고 칭한다면 자카르파탸와 슬로바키아 등 루신인들 거주지역 일대의 동방 가톨릭 교회는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회라 칭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